고창읍성

◆고창읍성의 연혁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 들이 유비무환의 실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추기지로서 국난호국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소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락적인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고창읍성의 축성목적
고창읍성의 축성은 민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축성했을까? 지역적인 여건과 성의 필요성을 살펴야 할 것이다.
산은 성과 연결이 잘 되는 곳에 축성하게 되는데, 고창읍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입암산성이 있으며, 입암산성은 나주진관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호남내륙에서 한양에 갈때는 노령산맥이 갈재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갈재는 험준하고 방장산과 입암산을 끼고 있어 도적떼들이 한양가는 행인을 괴롭히고 봉변을 주는 곳이었다. 이러한 곳을 지키고 영광, 고창, 장성 등 부근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을 법성포를 통해 반출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입암산성이 담당했었다.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도 입암산성을 막아야 하는데, 입암산성과 법성포와 고창, 영광 지역은 너무 멀어, 왜구나 도적들이 출몰했다는 전갈을 박고 입암산성에서 출영했을 때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된다. 결국 입암산성의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해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고창읍성은 그래서 축성되어 호남내륙을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지켜왔다.

◆고창읍성의 축성방식
고창읍성은 어떤 방식으로 축성되었을까? 성을 쌓기 위한 그 많은 석재를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운반해 왔으며 어떠한 방법으로 쌓았는지 정확히 알길이 없으나 다만 표석이라는 성벽에 새겨진 글로 확인했을 때 김제, 정읍, 진안, 장성, 고부, 용담, 영광, 무장, 능주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어 구역제로 맡아서 축성에 동원된 것을 확실하며 담양, 함평, 나주, 제주 주민까지 동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 듯한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가끔 끼여 있다. 특히 북문인 공북루의 주츳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 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 온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

◆고창읍성의 특징
조선시대의 읍성들은 평야 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위했으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창읍성만이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을 비법으로 사용하였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 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 할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며 살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목을 만들어 놓았다.
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계유년(1453)에 전라 좌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고창읍성의 답성(성 밟기) 놀이
고창읍성의 답성민속은 성돌이, 성밟기에 그 어원을 도구 지금까지 우리네 고유민속으로 전래되고 있다.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근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호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에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대열이 절정이 이루고 있다.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세바퀴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 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 부녀자들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네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국민의 날로 정하고 「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1.6KM를 머리에 돌이 올리고 걸으면 건강에 큰 도움이 되겠지요.

유사시를 대비한 성 안에도 양반들이 먹고 노는 정자를 지었으며 연못까지 만들었다.

만드는 민초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관청의 모습이다.

성곽의 길 바닥은 시멘트와 같이 단단한 진흑으로 만들어졌다.

망루에서 본 성곽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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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를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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